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문단 편집) ==== 충동 ====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자연의 인과법칙에 종속되는 순수이성(이론이성[* 피히테는 칸트의 순수이성을 '이론이성'이라고 불렀다.])과 그 자연의 인과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인과의 시작이 되는 실천이성으로 나누었다. 스스로가 인과의 시작이라는 것은 자연 법칙에서 벗어나 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며, 이러한 도덕적 행위는 인간이 자율적으로 행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자유'에 속한다. 따라서 이론이성(순수이성) 보다 실천이성이 우위에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칸트의 윤리학이며, 여기까지는 피히테도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피히테에게 있어서 자아는 하나의 자아가 되어야 한다.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이 구분되어서는 안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절대적 자아'이다. 독립된 '절대적 자아'가 정립되자마자 직관적으로 그 자아 밖의 '자연'(비아) 역시 절대적으로 규정(정립)되고, 이후 이 사이를 매개하는 '경험적 자아'와 '경험당하는 비아'가 정립된다. 이제, 모든 문제는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아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즉, '자아가 어떤 활동을 하는가?' '자아의 활동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로 되어버린 것이다. 피히테는 자아의 활동, 그 내면에 '의지', '욕망' 등이 있음을 파악한다. 그것을 피히테는 '추구'(Streben)라고 한다. 자아는 자연을 대상으로 경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자아의 추구작용에 대해 반대추구 내지는 저지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자아의 '추구'는 종종 세상(자연)에 의해 '저지'(Anstoß)당한다. 즉, 이제 자아는 그 자아를 저지하는 세상(자연)을 변화시키기를 욕망하는 자아가 되는 것이다. 피히테에 따르면,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세상에 안주하기를 원하는 여러가지 '추구'들은 그 내면의 '충동'(Trieb)들에 의해서 작동되어진다. 충동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자연충동은 물질적인 것을 목표로 오직 즐기고 누리기 위한 충동인데 비하여, 순수충동은 '절대자에로의 절대적인 경향' 내지 '그 자신을 위한 독립적인 활동을 향한 충동'을 말한다.[* 자연충동의 대표적인 예는 성충동이다.(다만 피히테에게 있어서 자연충동은 '악'이 아니다. 성충동과 결혼충동 등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 다만 이런 자연충동들은 저차원적인 충동이라는 것이다. '악'의 문제는 셸링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순수충동의 대표적인 예는 '자아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자기 규정의 충동이거나 또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충동을 말한다. 피히테는 자연충동과 순수충동을 자아의 가장 근원적인 충동이라고 보아 근원충동이라 한다.] 이 두 가지 충동 형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혼합된 충동'으로 나타나는데, 이 '혼합된 충동'이 의무적 의식으로서의 '양심'(Gewissen)[* 피히테는 양심 또한 충동의 일종으로 본다. 피히테의 '양심'은 "항상 너의 도덕적 사명을 완수하라"는 것으로서 칸트의 '실천이성'의 정언명법과 비슷하지만, 다른점은 양심은 '윤리적 충동'으로서 다른 충동들과 함께 우리 내면 속에서 다툰다는 점이다.]을 통해 도덕적 실천으로 드러나는 과정이 피히테의 윤리학이 된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 단지 실천이성에만 기초한 경직된 윤리학이었다면, '''피히테의 윤리학은 순수충동과 자연충동을 통합하므로써 그 갈등 속에서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자아로서의 윤리학'''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윤리학 보다 더 훨씬 유연하고 현실적인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